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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 자연과 인간의 경계에서 묻는 윤리적 딜레마

by yellow_glasses 2025. 3. 23.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1. 영화 줄거리 요약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도쿄 외곽의 조용한 산골 마을 ‘미즈부키’를 배경으로, 도시에 기반을 둔 한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글램핑 사업을 추진하면서 벌어지는 갈등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이야기는 자연 속에서 소박하지만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타쿠미와 그의 어린 딸 하나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타쿠미는 마을 주변의 나무를 베고, 샘물을 긷고, 이웃의 도움을 주며 살아가는 인물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몸소 실천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도심의 회사를 대행하는 하청 업체가 글램핑장 부지를 선정하고, 폐수를 처리할 기반 시설조차 갖추지 않은 채 마을 개발을 밀어붙이려 하면서 마을은 점점 불편한 긴장에 휩싸인다. 주민설명회 장면에서는 개발을 ‘기회’로 보는 외부인들과, 생태계를 지키려는 주민들 간의 의견 차이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며, 경제성과 생존, 이익과 가치라는 이질적인 논리가 충돌한다. 타쿠미는 처음에는 관조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하나의 일상에 변화가 찾아오면서 그의 삶 또한 균열을 마주한다.

특히 타쿠미의 딸 하나는 이러한 변화에 순수한 시선으로 반응하며, 영화는 그녀의 존재를 통해 ‘악’이라는 개념이 과연 누구의 관점에서 정의되는지를 조용히 반문한다. 전체적으로 영화는 인물 간의 격렬한 감정 표현보다 자연의 침묵과 흐름 속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들에 집중하며, 서서히 현실을 파고드는 불편함을 구축해 나간다. 단순히 도시와 농촌, 개발과 보존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 자연과 인간이 어떤 태도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가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2. 영화의 디테일/예술적인 감상 포인트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연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면서도, 자연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서사를 구축합니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인물의 심리를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인물의 감정과 상황을 둘러싼 환경을 카메라에 천천히 담아냄으로써, 말 없는 존재들이 얼마나 큰 서사를 품을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영화의 초반부, 타쿠미가 숲을 가로질러 물을 긷고 나무를 하는 장면은 압도적으로 고요합니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결코 비어 있지 않습니다. 정적인 롱테이크와 정밀하게 설계된 사운드 디자인은 관객으로 하여금 자연의 숨소리, 나뭇잎의 흔들림, 물방울의 낙차 하나하나에 귀 기울이게 만듭니다. 이러한 방식은 단순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이 무심코 침해하고 있는 ‘자연의 질서’라는 개념을 체화하게 합니다.

마을 회관에서 펼쳐지는 주민설명회 시퀀스는 그와 대조적으로, 말이 쏟아지고 논리가 충돌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하마구치의 연출은 이 장면조차 감정의 과잉 없이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개발사 측 인물들의 부주의한 언어와 마을 주민들의 절제된 분노가 오가는 이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극적인 감정의 움직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는 일관되게 거리를 유지합니다. 그 거리감은 도리어 관객으로 하여금 더 깊은 불편함과 현실적인 몰입을 유도합니다.

놓치기 쉬운 감상 포인트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한 장면—숲속에서 사라지는 소녀 하나의 뒷모습입니다. 대사는 없고, 설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장면은 영화 전체가 말하고자 했던 ‘악의 부재’ 또는 ‘악의 모호함’을 상징적으로 압축해 보여주는 장면으로 읽힙니다. 자연은 끝내 침묵하고, 인간은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거나 끝내 찾지 못한 채 서성입니다. 하마구치는 그 불확실성의 순간에서조차 카메라를 움직이지 않고 지켜보는 쪽을 택합니다. 

악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있다면, 그것은 정의의 부재가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침묵으로 가득한 곳일 것이다.


3. 영화 감독과 출연 배우 소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전작 『드라이브 마이 카』를 통해 인물 내면의 정적을 견고하게 쌓아 올리는 연출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도 그 특유의 절제된 미학과 서정적 리듬을 고스란히 이어갑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대사보다 침묵, 사건보다 여운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을 택하며, 배우들 또한 그 미묘한 연출 언어를 섬세하게 구현해냅니다.

주연 배우 오미카 히토시는 타쿠미라는 인물을 마치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듯한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그는 과장된 감정의 기복 없이, 나무를 베고 물을 긷고 이웃을 돕는 일상의 리듬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특히 그의 눈빛과 말간 표정에서 느껴지는 잔잔한 분노와 슬픔은,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악의 모호함’이라는 주제를 뒷받침하며 관객에게 서서히 스며드는 감정적 파장을 전합니다.

니시카와 료가 연기한 딸 하나는 영화 속에서 순수함의 상징이자, 그 세계의 균형을 대표하는 존재입니다. 아이답게 굼뜨고 천진난만하면서도, 자신이 자라온 세계가 위협받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감지하는 섬세한 감정의 결을 표현해냅니다. 특히 말이 거의 없는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숲속을 헤매고, 타쿠미를 응시하는 시선에서 우리는 ‘소녀’ 이상의 감정과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녀의 존재는 단순한 감정이입을 넘어, 관객이 영화의 세계를 신비롭게 체험하는 통로로 작용합니다.

조연 배우들 또한 하마구치의 미니멀한 연출에 맞춰 과장 없는 내면 연기로 영화의 세계관에 유기적으로 스며듭니다. 주민설명회에서 개발사 측을 대표하는 인물들의 어색하면서도 현실적인 말투, 시선을 회피하는 미세한 표정의 변화 등은 일상의 어딘가에서 봤을 법한 현실감으로 영화의 몰입도를 높입니다.

결과적으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배우들의 ‘연기’보다 ‘존재’를 지향하는 작품이고, 그 안에서 배우들은 ‘무언가를 보여주기보다, 존재함으로써 말하는 방식’으로 관객과 소통합니다. 그것이 이 작품이 남기는 가장 깊은 울림 중 하나입니다.


4. 영화 총평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응시하는 작품입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인물의 내면보다는 ‘상태’를 포착하는 데 집중합니다. 정돈된 플롯 대신 흐름을 따라가며, 마치 숲의 공기처럼 서서히 스며드는 감정과 분위기를 통해 윤리적 딜레마의 본질에 다가섭니다. 영화는 도시 자본이 밀고 들어오는 ‘개발’이라는 이름의 침범을 통해,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청정한 자연, 이웃 간의 신뢰, 삶의 리듬—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중심에 놓인 타쿠미와 하나의 이야기는 단순한 가족 서사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암시하는 철학적 은유입니다. 하마구치 감독은 극적인 사건이나 감정의 폭발 대신,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장면들에 시간을 부여하며, 관객이 그 속에서 질문을 ‘스스로’ 찾아가게 만듭니다. 이 영화는 설명이 아니라 여백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 여백이야말로 사유의 공간입니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관객은 무엇이 옳았는지 단언할 수 없게 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영화는 우리에게 진짜 질문을 던지는 것이지요—악은 정말 존재하지 않는가, 아니면 우리가 그것을 감당할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일 뿐인가.

이 작품이 제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이유는 명백합니다. 그 어떤 정치적 구호보다 더 조용한 방식으로, 그리고 그 어떤 메시지보다 더 무거운 사유로, 인간의 윤리와 존재의 조건을 묻기 때문입니다.

 

‘악’은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우리는 다만, 그 존재를 외면할 수 있는 구조 안에 머물고 있을 뿐.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